말 못할 일들을 공책에 가득히 채우고 난 뒤에 자리에 가만히 조각난 기억에 걱정만 가득해 영문도 모른채 홀로 멍하니 말 못할 일들을 공책에 가득히 채우고 난 뒤에 성냥에 불을
우리는 이 무대를 끝내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빛을 꺼내려고 벼락을 샅샅이 뒤지던 날의 일기를 낭독하며 우리의 짐작은 모두 어둠의 심부름이라는 것을 알고 지혈되지 않던 밤이 기쁘기도 하였지 인형탈을 벗고 쉬는 용서를 보았지 함부로 깨웠다가 영영 잠들지 않는 자명종을 서로의 목에 걸어주고 꿈에서만 참견하는 꿈을 꾸는 둘레를 골절된 영혼의 인형극에 몰입하며 우리는 차례를 기다린 건지도 모른다 바닥난 사랑에도 이 무대는 영영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다음에 올 행복을 모사하는 것도 슬픔이 가진 배역이므로 관객들은 환호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가까이 다가오는 출구를 열지 못하고 우리는 무대 끝에 서 있다 무대에 두고 온 이 시는 이렇게 끝이 난다 아무도 끝까지 읽은 적 없는 시를 누구도 버린 적 없는 시를 우리는 읽어본 적 있다 쓰다만 시를 다시 쓰기 위해 아름다운 퇴장을 위해
접시를 그렸다 하얀 색으로 귤을 그려 올려 두고 나란히 겨울도 그려 두었지 따뜻해 햇살을 그리며 말했다 느리게 바람이 불고 그림이 움직인다 흘러가듯 나는 가까이 다가가 그림을 들여다보는 대신 바닥에 떨어진 귤과 겨울과 햇살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언제든 조금은 웃을 수 있어 라고 말하며 손바닥 안에 두고 보여주지 않던 것들을 떠올린다 웃음이 되어 머물다 사라지려고 소리를 모으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과 비슷할까 나는 그림을 접어 흰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셔츠의 가슴이 볼록해진다 강물처럼 걸어간다 귤 향기가 희미하게 번진다 접시가 물 위에 떠내려간다 나는 접시 위에 올라탄다 앉아서 귤껍질을 깐다 물고기들에게 귤을 던져 주고 껍질은 손바닥 안에 쥐고 겨울이 흘러가는 것을 본다 내가 나를 따라가고 나를 내가 따라간다 잘생긴 고독한 아이가 흘러간다 사람들은 왜 바보처럼 웃을까 웃는 건 바보 같은 일이니까 아이는 말이 없고 하늘도 쳐다보지 않지만 물 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다 겨울이 왔으니 모두 집으로 가야 한다 아이는 물 위에 집을 그리고 문을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간다 집은 물에 녹아 사라진다 이런 계절이 왔으니 사람들이 비밀이라고 발음하는 것이고 그것은 당연하다
목을 길게 뺀 안테나가 저 손톱만한 달이 콱 걸리기를 기다린다
기억해? 말을 아끼면 아낄수록 캥거루가 열리는 교실 이분단과 삼분단 사이에서 자라나는 유치를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 나머지 공부를 하게 될까봐 속주머니 속마음을 알게 될까 봐 합죽이가 됩시다, 해놓고 선생님은 계속 노래를 불렀어 제일 예쁘게 경청하는 애한테는 화두를 던져줄게 사탕을 조르지도 않았는데 알사탕 별사탕 이왕이면 눈깔사탕이라며 ①우리 같이 노래할까요? 합창으로 수렴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여러분, ②립싱크의 정석은 이제 다 컸다는 듯이 입을 맞추는 것 ③나는 나는 내속의 나는 ④앵콜요청금지[1]를 금지하는 바입니다. ⑤어서 빨리 채점을 주세요 달게 받을 준비가 돼있으니 우리 딴 짓을 할까 아님 딴 짓하는 척을 할까? 철수는 컴퍼스를 잃어버렸다며 동그라미를 빌리러 다녔어 그럼 못 써, 그럼 못 써, 하면서도 자기 걸 내어주고야 마는 영희를 누가 이해했겠니? 걔는 하루 종일 동그라미를 빌려 쓰더라 출석부에도 오답노트에도 꿈에도 꿈에 그린 졸업식에도 아아아 우우우 삐뚤빼뚤 찌그러진 아이들이 구르고 다시 그리고 철수의 필통 속 컴퍼스를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 짝꿍이 생길까봐 짝꿍을 알아버릴까 봐 이름표를 잃어버린 애를 위로할까 봐 어렵고 간지러운 주머니를 긁는다 나는 도통 오늘에 재능이 없어서 입을 벌리고 입을 꾹 다물고 철수와 영희를 성장과 충치를 다정다감을 사랑하는 스포일러를 구구절절을 제일 못난 최선에 묻는다 속으로 삼키면 속으로 쑥쑥 크는 읽기 쓰기 말하기 잘 지내! 잘 살아! 잘 가! 텅 빈 연습장의 끝자락 서로의 페이지를 접으며 입 맞추는 너희들 앞에서 슬픔은 학습되고 나는 반사, 할 수 없어서 마음을 아끼고 마음을 아껴버린 나머지 주머니에 손 넣어본다
1 브로콜리 너마저나를 건드리고 돌아서는 빛이 있었지 돌아섰는데도 빛이 나는 빛 등지지 않고도 멀어지는 것들은 나를 그리워하는 것만 같았지 섬에서 벗어나는 선박을 쫓는 갈매기들이 바다에 길들여지는 방식처럼 집요하게 떠나는 건 나였는데 섬이 나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그런 건 모두 별이 되었지 조금 더 가까이 가면 분진이 되어 흩어질 것 같아서 그 자리를 지키게 되는 그래서 우리가 닿을 수 없는 건 빛이라는 긴 줄을 쥐고 서로를 놓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이 해역에는 정박할 곳이 없어서 섬을 놓아줄 수가 없고 지키고 싶은 게 있다는 건 줄이 끊어질 때까지 장력을 버티는 일이겠지만 바다안개에 섬이 가려지고 빛의 끈이 느슨해지면 등지지 못해서 빛나던 것들을 그물처럼 감아 올려야 했지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빛을 신기루라고 하던데 한 뭉치의 별을 안고 있으면 섬은 바다의 마음 나도 그리움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지
그를 보게 된 건 어느 지하철 열차 안에서였다. 발작처럼 질주하는 열차 안에서 나는 덩어리의 형태로 난생처음 본 사람들과 섞여 있었다. 열차의 문이 이따금 열렸지만 내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목적지를 잊어버린 듯했다. 어느 순간 우리는 열차의 내장이 되어 지하터널을 떠돌고 있었다. 나는 숨을 내쉴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나 예리한 매스로 날 도려 내주길 바랬다. 이봐요, 이 친구는 종양이에요. 여기 계속 있으면 우리 모두 같이 썩고 말 거라고. 그렇게 나에게 삿대질하며 고함을 치길 바랬다. 하지만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소란을 만들기엔 우리는 모두 적잖이 피곤했다. 내가 그를 본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지하철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주변은 텅 비어있었다. 역겨운 악취라도 풍기는 듯 사람들은 그의 근처로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군. 악취를 풍기는 건 우리였지 그가 아니었다. 그의 목덜미에서는 깨끗하게 소독된 냄새가 은은하게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이 냄새를 알고 있다. 그것은 내가 가장 자주 꺼내 보던 기억. 깨끗이 닦은 유리병에 신선한 포름알데히드를 가득 부어 보관한 향기. 한 번도 그의 살을 만져 보지 못했지만 나는 그가 풍기는 살 내음을 여전히 머릿 속에 보관하고 있었다. 방부제의 입자는 그의 포근하게 엉킨 머리카락과 동그란 콧망울과 예민하게 찢긴 눈꼬리를 그리고 사라졌다. 항상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기억 속에서 그의 냄새를 끄집어 낼 때마다 말간 얼굴에 나의 손자국이 얼룩덜룩하게 묻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내 앞에서 우울에 젖은 얼굴을 힘없이 떨구고 앉아 있었다. 한 번만 당신을 만져보고 싶어. 나는 몸을 뒤틀며 악을 썼다. 이름 모를 사람들의 살갗이 끈적하게 내 손을 잡아당겼다. 주인 모를 살점들을 마구 뜯었다. 머리통을 밟고 비명도 내질렀다. 절단된 몸들은 서로를 붙잡았다. 손톱 밑으로는 핏물과 머리카락이 쌓여갔다. 그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열차의 철문 앞에 섰다. 열차는 여전히 달리는 중이었다. 끼익 쿵. 문이 열렸다. 문밖으로 바람이 먹이를 핥는 뱀의 혓바닥처럼 빠르게 그를 훑고 지나갔다. 마지막 대사. 안돼. 가지 마. 당신 이름을 말해줘- 암전. 거죽을 찢고 날아온 작살처럼 열차는 선로를 재빠르게 가로지른다. 미적지근한 바람이 휘몰아치고 열차가 멈춘다. 철문이 열리고 적막한 호실이 보이자 주인공은 비척거리며 차게 식은 플라스틱 의자로 걸어가 앉는다. 끈적한 눈물이 눈가를 비집고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듯 몰려오지만 주인공은 이내 질끈 눈을 감는다. 누군가를 떠올리기에는 이미 적잖이 피곤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렌즈없는안경을쓴그가좀처럼미동없는파도를 맥없이바라보다비가내리기시작해건물안으로 뛰어들어온다농구대밑숨어있는비젖은고양이 멀치감치바라보며크게나비야코코야옹아하며 괴상한고양이울음소리를흉내내며불러보지만 고양이도미동없는파도와물아일체된듯반응하 지않는다주머니속헤드렌턴을꺼내서비춰보니 그제서야고양이가고개를돌린다파도는그대로 맥주효모로추출한바디워시로온몸을구석구석 닦아낸그가흑맥주한모금을떠올리며샤워실을 나와서침대로향한다불꺼진침대에앉아축축한 수건으로대충머리를말리고큰통의믹스견과류 한통품에안은채뚜껑을열어냄새를킁킁맡았다 그는지독한어둠속에서손끝의신경에만집중해 오돌토돌커피땅콩골라내고매끄러운아몬드만 집어입속으로집어넣었다그가곰곰히생각한다 바나나칩을좋아하는사람과는절대로사랑에빠 질수없을것만같다고중얼거린다부숴지는파도
왜 눈은 바깥만을 볼까요? 나는 눈 뒤 뼈에 둥그런 골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딱 눈동자만 했다. 나는 종종 눈동자를 아주 반대편으로 돌려 나의 안을 보았다. 너무 깜깜한데요? 완전한 어둠입니다. 아, 저편에 작은 성냥이 보입니다. 나의 눈동자와 직선으로 존재하네요. 저기에 어떻게 불을 붙일 수 있을까요? 손은 바깥에 있으니까요. 나는 꼬박 영원을 고민하며 성냥을 노려봅니다. 나는 꿈을 꿉니다. 꿈에서는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일 수 있습니다. 성냥은 피를 붉히고 백골을 밝혔다. 불씨는 점점 장대해져 눈동자를 태우고 눈알을 태웁니다. 엄마, 무서워요. 저 사람 눈에서 불이 나요. 기다리거라, 곧.
앞차 전조등의 반대 방향으로 몸을 꺾으려고 마음먹어 볼 때 도로 위를 달리며 앞장섰다고 생각하려 애를 쓸 때 이미 다리 하나를 건너 꺼진 전화를 확인할 때 노래가 나오지 않아 새콤한 다짐을 겨우 흥얼거리고 바람결이 귓불을 두드리지 뒤에서 비추는 불빛이 헤드라이트인지 가로등인지 의식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강변은 가까워지고 있다 쫓아오고 쫓아가는 무리에서 벗어나 방향을 전환하는 뱀의 변덕처럼 신호등 앞에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움직이기 위해 손은 손가락을 견디듯이 위태롭다는 경고문이 불안을 지탱하듯이 작은 카펫에 서서 도착의 가능성을 시험하지 않으면서 최대한 가만히 서서 브레이크에 손을 올려도 무섭다고 생각하다니 원하는 것이 많아서 마른 입술을 핥으면 살짝 쓴맛이 났다 둥글게 지나갈수록 물러지는 라임의 하루처럼 원형교차로에선 머뭇거리게 되고 이젠 아무도 없는데 도망에서 도망치고 싶어지는 사람 이것은 나만의 일이 아니라고 믿고 싶은 순간 파란 불이 켜졌다 여기 없는 강변은 저기에 있을 것이다 계속되는 라이딩으로 강변은 저기에 있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작은 엑셀 주위에 끈적한 과즙 같은 걱정을 닦아낸다 버튼을 누르고 바람결이 몸을 밀어내는 동안 다시 강변으로 가자고 계속 생각하자 강변으로 가는 표지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카네이션을 샀다. 피어나는 걸 보려고 너는 늘 먼저 태어나지 닿기도 전에 허리가 휘어 있다. 새벽엔 내가 나와 잤다. 내가 오른쪽으로 누우면 내가 오른쪽으로 눕고 내가 날개뼈를 긁으면 내가 날개뼈를 긁었다. 같은 곳에 상처가 났다. 나는 울었지만 나는 울지 않았고 나와 나 사이에 공간이 있다가 없었다. 그것을 나의 생애라고 본다면 개가 나와 나의 사이를 파고들고 우리는 그제서야 헤어진다. 방안에는 카네이션 냄새가 진동하고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것은 이미 지나온 일. 나는 가끔 내가 너무 멀다.
이제 겨우 그 이름이 조금은 동그래졌나보다 마음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녀도 마음이 벗겨지지 않을만큼 조금은 동그래졌나보다
어쩐지 너무 보고 싶어 밤잠을 설쳤고 꿈에 그의 편지가 나왔다 편지는 그가 서울을 떠났던 날, 그날부터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밝은 라임색의 편지지, 처음에는 한 장인 줄 알았다가 나중에 보니 긴 내용이 쓰여 있었고 컴퓨터로 타이핑되어있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매우 기뻤고 답장을 쓰려고 허둥대던 게 기억난다 집에서 쉬다가 아트시네마에 예매한 영화를 보러 나섰는데 시간이 늦어서 포기하고 신길역에 들러 옷을 샀다 목 폴라티 두 장 면티 한 장 8시 15분 스폰지 하우스에서 몽상가들을 상영 중이었다 나는 그 영화를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안국역에 내렸다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 영화시작 40여분 전에 카페를 나섰다 묘하게 다른 공기에 발걸음은 가볍게 광화문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나는 지난번 친구들과 함께한 철도민영화 반대 집회가 생각났다 그때 신었던 신발과 같은 것이군 그날도 핫초코를 먹었지 역시 날이 많이 풀렸어 그날은 정말 추웠거든 따위를 생각했다 작은 영화관에 가니 아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초대권을 발권해주었다 나는 내가 먹고 있던 과자를 권했고 티켓부스 안에서 그는 그것을 맛있게 먹었다 영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나는 휴대폰 전원을 껐다 아무렴 그래야지 몽상가들은 정말 훌륭한 영화였다 나는 아름다움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사랑에 끙끙 몸부림쳤다 그리고 혁명 혁명이라니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 휴대전화의 전원을 다시 켰다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발신이 불가능한 번호 몇 번의 검색을 통해 그 전화가 나라에서 걸려왔다는 걸 확인한다 그의 전화다 나는 그가 말했던 몽상가들을 보았고 그는 내게 전화했다 얼마나 절절하게 닿으려 했는지 그는 알까 아무튼 그는 전화를 걸었고 나는 받지 못했다 영화관을 나서고 난후 내내 내 그림자를 보며 걸었다 그와 마지막으로 나눴던 문자 메시지 어젯밤 곱씹었던 그 메시지가 실현되었는데 왜 나는 삶이란 이렇게 작은 고독의 상처들로 가득하다는 롤랑바르트의 문장을 작게 읊조렸다 편의점에 들어가 물을 샀다 가슴에 불이 났기 때문이다 목이 탔다 작은 생수와 큰 생수의 가격차이는 얼마나지 않았다 큰 생수병을 들었다 물을 술처럼 마셨다 물은 술이고 술은 물이고 나는 와인이 마시고 싶었다 이열치열 내 사랑은 물로 끌 수 없는 불이다 그러다 생각의 꼬리가 군대에 있는데 어떻게 타이핑한 편지를 보내나 하는 생각도 들더라 보름달이 엄청나게 큰 달이 하늘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고민 언니 그렇게 순진하게 웃지 마세요 저 같은 애들은 그 웃음에 죽고 못 산단 말이에요 고민 2 제가 언니를 제 전부라고 말해 버릴 수 있을까요? 그럼 제 전부는 작은 걸까요, 큰 걸까요? 시작 닿지 않을 말들을 속으로만 되뇌면서 나는 이미 고백을 마쳤다고 생각했다 분명 속으로 말했는데 왜 언니는 다 알고 있지? 중간 언니는 커피를 싫어한다 술은 좋아하면서 나랑 키스할 때면 꼭 혀를 깨물고 실수인 척한다 영화를 볼 때 너무 자주 운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도 돌아보면 안 된다 항상 입을 살짝 벌리고 잔다 자기는 절대 그런 적이 없다고 한다 (언니한테는 이 시간이 길었고 나한테는 짧았다) 중간의 끝 다들 속도 없이 언니 얘기를 한다 언니는 나한테만 바쁘다 말해 버릴까? 아니, 아마 언니가 다시는 날 안 볼 것이다 끝 잘 지내, 바닥에 툭 떨어진 말 언니 없이 어떻게 잘 지내냐는 진부한 말을 뱉을 자신은 없었다 나도 언니 예상에서 벗어나 보고 싶었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고 돌아섰다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인부가 침을 뱉고 있다. 그는 이제 곧 무너트릴 건물을 잠깐 바라보다 포크레인에 올라탔다. 포크레인이 내리는 비는 어떨까. 건물이 무너지자 먼지가 일어났다. 포크레인이 순식간에 실루엣만 남게 되어도 작업은 계속된다. 작업에는 뜻이 없고, 다음만 있다. 장례식장에 다녀온 길이었다. 건물은 거의 다 무너지고, 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리는지 포크레인은 가만히 서 있다. 먼지가 다 가라앉자 인부는 포크레인에서 내린다. 호스를 잡고 물을 뿌린다. 정원에 물을 주는 방식은 아니다. 살아나라, 살아나라며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빙그르르 도는 인부르르 보다가 돌아간다. 어디로 돌아가는 중이었지.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을 위해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고 꺼지고 다시 들어오고. 저건 가로등의 작업이었다. 인부가 지르밟던 담배꽁초가 생각났다. 지나갔는데도 그건 모조리 끝났을 거고 저 자리에는 새로운 건물이 세워질 거다. 경이롭게도 허문 건물보다 더 번쩍거리고 유용하며 새 모습으로 고생이 많으십니다. 잘 좀 부탁드립니다. 잘, 좀 부탁드립니다.
나는 진주에 갔다. 나는 진주로 돌아갔다. 아니다. 8년 만이다. 12년을 살았다. 나는 12년을 산 진주에 갔다. 터널이다. 터널에는 빛이 있다. 노란등, 하얀등. 꼭 영사기 안에서 돌아가는 필름 같다. 노란등, 하얀등, 노란등, 하얀등, 하얀등, 노란등. 출발은 버스터미널이었지만 도착은 터미널이 아니다. 개양 정류장. 아니다. 터미널이다. 택시 터미널. 진주택시는 레몬색이다. 레몬색이었다. 택시는 레몬색이어야했다. 택시 정류장에는 레몬색 택시가 하나, 주황색 택시가 둘. 주황색 택시가 앞에 있어서 주황색 택시를 탔다. 가좌주공아파트. 복도식 아파트. 1-10라인. 이웃이 10명. 이웃은 10명인데 빨랫줄은 1개. 이웃은 10명인데 집은 1채, 아니 1개. 평거현대아파트. 1-2라인. 아파트. 그냥 아파트. 복도식이 아니다. 뭐라고 부르지? 그냥 아파트. 집이 2채, 아니 2개. 빨랫줄도 2개. 이웃은 0명. 엘리베이터. 구멍이 있는 엘리베이터. 올라간다. 1층, 1.5층, 2층, 2.5층, 3층, 3.5층, 4층. 노란등, 하얀등, 노란등, 하얀등. 엘리베이터는 호러필름. 다음층에 누가 나를 들여다보고 있을지도 몰라. 다음층에 누가 탈지도 몰라. 나는 호러영화가 싫다. 15층. 꼭대기. 15.5층은 없다. 필름의 끝. 필름의 끝은 하얗다. 그럼 노란등, 하얀등. 하얀등. 하얀등. 빛을 먹은 검은 필름. 필름카메라는 뚜껑을 열면 안된다. 현상기도 뚜껑을 열면 안된다. 뚜껑을 열면 찍었던 사진이 다 날아간다. 사진관에서 일할 때 다른 직원이 현상 중인 현상기 뚜껑을 열어버렸다. 필름의 주인이 찾아왔다. 손님의 얼굴도 하얗다. 날아간다. 날아간다. 동물원 사진을 들고왔다. 진양호 동물원. 진양호 동물원의 코끼리. 코끼리. 코끼리 아저씨는 코가 손이래. 과자를 주면은 코로 받지요. 코끼리 아저씨는 뻥튀기를 좋아해. 코끼리, 코끼리. 없다. 코끼리는 없다. 코끼리 아저씨는 없다. 코끼리 아저씨는 집으로 갔다. 집으로 돌아갔다. 8년 만에. 코끼리 아저씨는 집에 갔다. 코끼리 아저씨 집은 어디지? 아프리카? 인도? 서울? 코끼리 아저씨가 나보다 더 서울 사람일지도 몰라. 아니. 서울 코끼리. 서울 동물. 서울 3년차. 나는 서울에 집이 3개. 연희동, 창천동, 그리고 연희동. 집이 3개. 부산에는 1개. 용호동. 진주에는 3개. 가좌동, 신안동, 평거동. 아, 하대동. 하대동. 하대동 무슨 아파트지? 아무튼 4개. 집이 8개. 그리고 옷수선집. 이모야네 옷수선집. 옷수선집도 집인가? 옷수선집은 거실이 없다. 부엌도 없다. 옷수선집은 옷장. 붉은색이 조금 섞인 갈색. 체리나무 집. 먼지 냄새. 나는 옷장에서 살았다. 옷장에 내 인디언 친구를 초대했다. 안녕? 우리집이야. 아 그럼 옷장도 집인가? 그럼 나는 집이 16개. 아니다 8개. 8개는 엄마집. 옷장만 내 집. 지금 내 집은 흰색. 흰색 합판집. 내 집. 아니다. 권금애씨 집. 옷장은 옵션. 내 집은 0개. 0개. 아니다. 옷수선집. 내 집은 1개. 꽃집 옆 옷수선 가게. 비닐하우스 꽃집 옆 컨테이너 박스. 내 집. 개양꽃집 옆에는 컨테이너 박스가 없다. 있었는데 없다. 내 집. 내집. 개양꽃집 옆에는 콘크리트. 빌라.
고향은 안전한 곳이자 동시에 안주하게 되는 곳이다. 그런 고향을 나를 꾸며 줄 수 있는 전시 요소로 타지생활에서 활용했다. 그렇게 전시된 파편의 순간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꺼냈다. Piece.1 첫 직장 선배와 점심식사 자리에서 선배는 나의 출신지를 물어보았다. “용헌이 너는 고향이 어디니?” ‘충남에 아산이라는 곳입니다.’ “아산? 아산이 어디 있더라..” “충남에요. 천안 옆에 아산이라고, 선배 혹시 온양 아시나요? 온천온천이요.”(온양은 아산의 옛 지명이다.) “아, 온양- 그래서 네가 피부가 그렇게 좋구나?” “에이, 아닙니다.” “그럼, 목욕탕은 어디 가면 좋아?” “온양 로컬들이 가는 곳을 가시고 싶으시면, 온양온천역 주변에 온양 관광호텔이라고 있어요, 거기 호텔 안에 목욕탕을 추천해 드립니다. 입문 코스로 좋거든요. 시설도 깔끔하고. 아, 그쪽이 예전에 조선 시대 왕들이 머물며 목욕한 온양행궁 터이기도 한 역사적인 장소거든요.” “뭐야 너 왜 이렇게 잘 알아? 애향심이 대단한데?” “그런가요? 살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 같습니다. ” “용헌이 너는 말을 참 완결성 있게 하는구나.” 이때부터였다. 지방의 소도시지만, 내 고향이 사람들에게 꽤 특색있는 도시로 어필될 수 있다고 느낀 건. 나는 이후로 새로 관계하는 이들에게 고향에 관한 얘기를 마치 나만의 콘텐츠를 이야기하듯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다녔다. Piece.2 언젠가 만나던 이성 친구가 내게 질문했다. “고향 생각하면 특별히 기억나는 거 있어?” “고향? 응 당연히 있지.” “뭔데?” “온양에 성웅 이순신 축제라는 걸 하거든 1년에 한 번.” “이순신 장군?? 그래서?” “응 그러니까, 이순신 장군님이 유년기를 보낸 생가가 온양에 있어, 그래서 매년 그의 탄신일을 기념해서 큰 행사가 열리는 거지.” “재밌다. 야시장 그런 거 열리는 거야? 나도 보고 싶다.” “그러게, 나도 오랜만에 가고 싶네. 안 간지 엄청 오래됐어. 예전에 내 생일 때 고향 생각하며 SNS에 쓴 글이 있는데, 한번 볼래?” 매해 맞이하는 생일은 특별할 게 없다. 그러나 유년 시절 생일은 항상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온양’에서는 매년 이순신 장군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웅이순신축제’가 열린다. 축제 하루 전인 내 생일에는 전야제가 열리는데, 덕분에 난 생일마다 나름 대규모의 불꽃놀이를 구경할 수 있었다. 저녁 8시쯤 푸짐한 생일상을 집에서 먹고 있으면 밖에서 펑펑 소리를 듣고 불꽃놀이를 보려 놀이터 미끄럼틀로 뛰어나가곤 했다. 축제가 뭔지도 몰랐던 꼬맹이는 그저 엄마가 “네 생일이니까 불꽃놀이 하는 거야” 라는 말만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러고 보면 참 행복한 기억들이다. 매년 생일마다 불꽃놀이를 볼 수 있었다는 건. Piece.3 사회생활을 하며 알게 된 업계 선배는 나의 고향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며 내게 목욕탕 사업을 제안했다. “용헌 씨, 고향에서 목욕탕 해보는 건 어때요?” “목욕탕이요?” “네, 서울 근교에 남녀 데이트할 장소가 은근히 없잖아요. 서울에서 빠르면 1시간 30분이면 갈 수 있어서 접근성도 좋고, 지역 역사도 깊으니까 가능성 있을 것 같은데요?” “좋죠, 컨셉을 만들어서 한 번 해볼까요?” “일본에 가면 있는 료칸처럼 특색있는 온천을 만들어 보는 거예요, 왜 한국에는 그런 게 없잖아요. 오래된 목욕탕 인수해서 코지하게 만드는 거죠, 커플은 커플대로 즐기고, 모르는 사람들은 그들끼리 교류도 할 수 있는 그런 공간으로.” “너무 좋은데요? 콘텐츠가 담긴 목욕탕. 완전 동시대적 목욕탕이 될 것 같은.. 그럼, 목욕탕 이름은 뭘로 정할까요? “힙.탕 어떻습니까?” 등잔 밑은 매번 어둡다. 난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목욕탕을 해보기로 다짐했다. 근미래면 더 좋고. 언제든 돌아가서 목욕탕을 하면 되겠지 하는 막연하고 매우 위험한 안도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Piece.4 추석 시즌, 회사에서 나오는 잡지에 사진 촬영을 담당하는 사진가와 어느 아이돌 가수 촬영을 마친 뒤 나는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물어보았다. “실장님은 추석에 어디 가세요? 고향에 가시나요?”(내가 일하는 분야에서는 대개 같이 일하는 프로 스태프를 실장님이라 지칭한다.) “네. 내려가요, 아산이라고.” “경기도 안산이요?” “아니요, 충남 아산이요.” “아산이요!? 온양?? 온양온천???” “어머?” “와, 실장님 온양 사람이셨어요?? 그녀는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용헌 씨 몇 년 생이었지?” 사회에서 일하며 처음으로 고향 사람을 만났다. 온양은 동네가 좁기 때문에 소위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사이다. 나와 그녀의 관계 거리도 그러했다. Piece.4-1 한 다리 건너 한 단계 더 가까운 관계가 된 사진 실장님과 다른 날 고향 관련 다른 대화를 나누었다. “저 고향에 내려가고 싶어요. 서울 생활도 버겁고 무엇보다 내려가서 하고 싶은 게 생겼거든요.” “언제쯤?” “한 불혹 정도 되면요?” “아이구, 왜 가서 뭐 할 건데요?” “목욕탕이요, 저 목욕탕 한 번 해보려고요. 완전 힙하게. 엄마한테 오래된 목욕탕 나오는 데 없는지 잘 주시하라고 진지하게 말씀드려놨어요.” “근데 용헌 씨, 그거 알아? 내가 어디서 들었는데, 온양 시내에 있는 온천은 이제 다 말랐다고 하던데?” “온천이 마른다고요? 무한으로 나오는 거 아니에요?” 영원할 것만 같은 온천이 없어진다니, 믿고 싶지 않았다. 마음 한 켠에 단단히 쌓아놓은 안도의 벽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굳이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꿈이 사라지는 거니까. Piece.5 함께 일하는 다른 사진가의 SNS를 통해 고향 집 앞에 있는 박물관에 다녀온 것을 보았다. 신기한 마음에 말을 걸었다. “이곳에 무슨 일로 다녀오셨나요??” “아, 맞다 여기 용헌 씨 동네이시죠.” “네 맞아요, 이 박물관 저한테는 초등학교 때 소풍 가거나, 다른 도시에 사는 지인 놀러 오면 한 번씩 산책하러 나가는 장소거든요, 심지어 저희 친누나는 여기에서 결혼식도 올렸어요.” 반가운 마음이 앞서 그녀에게 뻔뻔한 태도로 tmi를 늘어놓았다. “아, 그러시구나. 여기 요즘 소소하게 핫한 곳이래요. 마침 친구가 관련 프로젝트를 해서 저도 다녀와 봤어요. 정말 좋던데요?” “네? 정말요?? 이럴 수가..” 머릿속이 굉장히 복잡했다. 고향에서만큼은 문화를 선도하는 트렌드세터가 되고 싶었다. 허무했다. 내가 아는 동네 박물관에서 서울의 작가들이 전시를 한다고? 지역 활성화에 기여하는 그런 폼나는 일은 내가 먼저 해야 하는데, 그런 콘텐츠가 이미 내가 아는 그 온양에 있었다고? Piece.6 수개월 뒤 친누나로부터 전화 한 통화가 걸려왔다. “용헌아, 기쁜 소식!” “뭔데 나 바빠 빨리 말해.” “아빠 온양민속박물관에 취업했대!” “뭐? 정말?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아빠한테 축하 전화 한 번 드려봐 좋아하실 거야.” 놀라운 일이다. 아빠는 얼마 전 본 직업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마침 제2의 직업을 구직하고 있었다. Piece.6-1 “아빠, 박물관에 취업했어요? 정말이야?” 1초, 2초, 3초… “응, 그렇게 됐어.” 딱 3초가 흐른 뒤 아빠가 대답했다. 아빠는 뼛속까지 충청도 사람이다. 말투도 느리고, 낙천적인 성격에 웬만한 일에도 놀라지 않고 늘 침착한 반응으로 일관한다. 난 그런 아빠의 성격이 좋다. 이따금 엄마의 속을 태우기도 하지만. “아빠, 요즘 서울에서 온양민속박물관 엄청 유명해졌어요, 거기에 서울에 젊은 작가들이 전시도 열고 해서 여기 사람들도 많이 구경하러 가고 그래.” “그래? 별일이 다 있네.” “그리고, 우리 동네서 흉물이라고 맨날 그러는 이상한 건축물 있잖아요, 박물관 뒤쪽에 있는.” “응응 알지.” “그 건물이 글쎄, 재일교포 건축가로 되게 유명한 이타미 준이란 사람이 만든 건축물이래. 아빠, 엄청 놀랍지 않아? 그것도 한국에서 가장 먼저 지은 건물이래요.” . . . . 고루하고 잘 아는 고향은 그립고 잘 모르는 고향으로. 나의 고향은.
아름다운 것들을 모아보자. 문제의 시작과 모든 환난 새벽을 여는 성도의 기도 그리고 시와 찬미. 해가 쨍한 토요일 아침 고집스러운 태만을 부리느라 머리가 딱딱해지고 마음이 거칠어지는 오후를 보낸다. 이 오후는 작고 물렁한 생명이 열심히 자라나는 시간이겠다.
이맘때쯤이 되면 떠오르는 두 마리의 개와 한 마리의 남자가 있다. 어렸을 때 친했던 옆집 친구는 미국인이라 크리스마스트리를 매년 베어오곤 했는데 우리 집은 플라스틱 인조 트리를 조립했기 때문에 나는 태어나서 진짜 ‘트리’는 그때 처음 보았다. 그 친구는 “아이거”라는 져먼 셰퍼드를 키웠는데, 아이거의 몸에서는 뿌링클 냄새가 났다. 뭔가 꼬릿한 인조 치즈 냄새. 그 친구는 맡지 못했지만 나는 친구 엄마의 차에 밴 아이거의 냄새가 싫었다. 내 키보다 큰 나무를 차에 싣고 오던 길. 트리를 차에 싣고 나니, 개의 냄새가 더는 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한 달 동안은 그 차안 가득 시원한 솔향이 났고, 한번 태운 그 트리와 남은 이파리들의 잔여가 이렇게 오랜 여운을 남긴다는 것이 신기했다. 딱 이십 년 전 맡았던 선명한 향기들을 생각하며 어떤 사람의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들어서니 키우던 개의 빈자리를 혼자 사는 남자의 허전한 냄새가 대신했다. 내가 비밀리에 민감해했던 너의 개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묘했다. 너는 이제 정말 없구나. 사람보다 자신의 개를 더 좋아했던 남자는 개를 떠나보내고 딱히 필요 없는 가전제품들로 집을 채우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향긋한 나무도 사랑하던 개도 없었을 차 안 누군가를 떠올린다. 꿈속에서 나는 조수석에 앉아있다. 동물병원 주차장에서 시동을 걸고 차마 떠나지 못한 너의 안쓰러운 냄새가 희미하게 들리는 듯하다가, 흩어진다.
쓰인 적 없는 동화를 쓰기로 지구가 운석에 충돌한다 그 전날에는 가장 맛있는 식사를 하는 너를 가만히 바라보고 웃어야지 충돌 당일에는 기쁜 마음으로 너와 사과 파이를 먹을 것이다 사과 파이를 포장해서 촛불을 켠다 작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크게 사랑을 하자 배경으로 영화를 틀어놓고 곧 사라질 미술관에서 로마의 판테온에서 천장을 보며 소원을 빈다 베를린 카이저 빌헬름 교회에서 빌었던 소원처럼 밤이 되면 스테인드글라스가 파랑으로 빛나는 모습을 우연히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새벽 한시에 영화가 끝나고 세상에 쓰인 적 없는 동화를 쓰기로 지구가 운석에 충돌한다 그 전날에는 가장 좋아하는 LP를 고르는 너를 가만히 바라보고 웃어야지 충돌 당일에는 기쁜 마음으로 너와 생일 축하합니다, 라고 노래해야지 작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크게 사랑을 하자 배경으로 영화를 틀어놓고 곧 사라질 미술관에서 로댕의 지옥의 문 앞에서 꼭대기를 올려다보며 소원을 빌었던 여덟 살의 아이는 베를린 구석의 잔디밭에서도 소원을 빌고 공중전화에 수신자부담으로 전화를 걸며 지하철 표를 사들고 아무 일도 아닌 일에 서럽게 울던 새벽 한 시에 영화가 끝나고 사과 파이 옆에는 샴페인이 놓여있다 곧 사라질 마지막 작품을 보기 위한 비행을 시작한다
시홀은 시를 읽고 보고 듣는 구멍입니다.
시홀은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만들어가는 온라인 전시의 형태에 주목하고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에 접근합니다.
올해 시홀은 판데믹 이후 일상의 일부가 되어버린 ‘고립’에 대한 사유로부터 파생된 주제들에 대한 시를 모집하였고, 뮤지션, 디자이너, 개발자가 협업하여 스크린에서의 시청각적 공간을 새롭게 구성하였습니다.
‹오늘 쓰고 버린 시›는 나 혼자의 방에서 아무도 모르게 생겨나고 사라진 생각들을 위한 공간입니다. 손으로 이미지를 지우면 비로소 드러나는 글들은 읽은 후 다시 사라집니다. 보여지고 감춰지는 시들을 통해 일상에서 만들고 버리는 작은 생각들을 기념합니다.
seehole imagines how poetry might be seen, heard and read in a digital space.
seehole takes an interdisciplinary approach to poetry, bringing poets, artists, designers, musicians and programmers together to form an interactive, audio-visual landscape.
‹A poem written and torn today› is a space for thoughts that form and dissolve when alone. Poems appear when the image is wiped away by touch, and disappear once again after they have been read. Through poems that mirror entropic thoughts, we commemorate the smallest contemplations that pass our minds over the course of the day.